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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 WE SPIRITUAL MACHINES? | The Beginning of a Debate #3. Conflicting Visions of the Future—and Reality

그래도, Joy의 공공연한 반응은 매우 중요한 이슈를 강조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분야를 담당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most of those in charge), 신과 같은 존재를 믿지 않게 될 때, 기술적인 발전이 신의 영역에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해왔던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힘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면 어떻게 될것인가? 


오늘날의 많은 과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신없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데 매우 확신한다. 그 확신은 두가지의 기본적인 형태를 띈다. 첫번째는 아래에 나오게 될, 유쾌하지만 뭔가 공허한것들이다. 예를 들어 Kurzweil은 진화를 '삶의 목적'으로 정의함으로서, 목적없는 진화적 과정으로부터 목적을 이끌어 낸다. 두번째는 Joy가 훌륭히 나타내었다. Joy와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 미래는 불안의 원천이다. 그들은 답은 찾지 못하였지만 대신, 인간의 창의력으로부터의 불확실한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 혹독한 노력이 필요하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현대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인류의 삶과 역사를 우연적이고, 가망이없고, 나쁜 결말로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역사를 단순한 우연의 범위내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들은 이를 멈추고 싶어한다. 과학은 부정적인 결과(어떤 발명이 재앙을 불러오지 않을것이라는 확신)에 대해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은 새로운 기술에 대해 -아마 원시인들이 불을 피울수조차 없을듯한-'경고 원칙(cautionary principle)'을 고수한다. 어찌 되었건, 1000년 이상동안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불에의해 죽어갔다. 이를 보며 과학이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그들은 인류의 끝없는 불안과 창의력은 기회 혹은 재주라고 생각하기 보다, 위협으로 생각한다.


인류는 과거의 역병이나 기근으로부터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것은 규제나 '포기'가 아닌, 창의력과 믿음을 통해 가능한 일이었다. 재앙이 발생하는 경우는 대개 우리가 자유나 섭리를 포기하거나 거부하고, 우리의 운명을 마음대로 계산하고 지배하려는 시도 때문이었다. 악이 필연적이고 선을 이해할 수 없는것으로, 그리고 폭정은 피할 수 없는것으로 생각하는 시기는 대개 우리가 일반 대중을 무작위적인 우주에서 우연찮게 진화된 인간들의 무리로 여길 때이다(when we regard the masses as a mob of mouths, accidentally evolved in a random universe). 


유신론자들에게 있어, 현실은 단순한 우연과 기계적 법칙 이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범주들은 신성한 자유와 창의성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고, 또한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의 범위로 들어와, 우리에게 있어 기술적 혁신과 부를 제공하는 가장 가까운 원천이 되는것이다. 인간의 창조적인 자유는 하향식 법과 초월적인 지시를 통해, 그리고 과학의 무질서를 통제하고 세상에서의 악에 대한 완벽한 승리를 부정하는 일신교리의 환경에서 풍요로워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누군가는, 발명과 혁신 그리고 기술에있어서의 긍정적인 면을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단 이들에 대한 발전은 거부한 채로). 이러한 견지가 없다면, 누군가는 양면의 거짓된 딜레마(false dilemma)사이에서 갈팡질팡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자신에 대한 주인이고 우리 자신을 정의할 수 있지만 운명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프로메테우스적 혼돈상태(Promethean anarchy)'에서 살것이냐, 혹은 우리자신과 우리의 엄청난 창의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하는, '과잉보호를 받는 하인(servants of a nanny state)'으로서 남을 것이냐?


Ray Kurzweil은 인간의 자유와 창의력으로부터 부와 성취가 이루어진다고 이해하며 이를 찬양한다. 또한 그는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러다이트(Luddite, 컴퓨터에 의한 기술 혁신을 반대하는 사람)에 대해 반대한다. Kurzweil과 Joy의 전망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라면, 우리는 아마 Kurzweil의 의견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만을 취할 필요는 없다. Kurzweil과 Joy는 다른 위대한 지식인들과 함께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공유한다. 이것은 인상적일만큼 그들에 대한 선택권을 제한하며, 우리의 의견에 있어, 우리가 현재 처해있는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을 실제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어지는 절에서 제시되는 많은 결론들은 함축적인 자연주의적 전제들의 논리적인 결과로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이와같은 가정을 공유하기 때문에, 굳이 이것을 명시적으로 적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한번 명시적으로 적게된다면, 어떻게 똑똑한 각 개인들이 진심으로 이에 반대할 수 있는가는 분명해진다.


* 사람의 지능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 염두하지 않은 과정상에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product of a process that didn't have us in mind)


따라서, Kurzweil과 다른이들이 생각하는 설계되고 초월적인 지능(designed and transcendent intelligence)은, 우리 자체로부터 만들어진 더 뛰어난 기술적 지능을 의미하며, 이것은 비지식적 과정(unintelligent process)으로부터 발전하는 것이다.


* 우리의 최종 분석(final analysis)에서 볼때, 우리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계산적 조합으로 이루어진 물질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다른 것으로 어떤것이 있을까?


* 우리의 기술이 일정 수준 상의 계산적 구조와 복잡도를 이끌어낼 때, 이것은 마치 우리처럼 의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의식은 물질적 범주로부터 설명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 만약 우리가 탄소가 기반이 된 복잡하고 계산적인 원자의 결합이고 여기에 의식이 부여되어 이루어진 것이라면, 충분히 복잡한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컴퓨터가 존재할 떄 동일한 이치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위와같은 자연주의적 가정이 주어졌을때에는 위와같은 결론이 이치에 맞는것으로 느껴지지만, 만약 이러한 가정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와 더불어, Kurzweil에게 있어 오직 유일한 구원과 종말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빠르게 진화하고 튼튼하고 믿음직한 기술과 함께할 때에 있다. 만약 우리가 영원함을 추구한다면, 계속 가속화되는 산출을 내는, 우주적 진화의 흐름에서의 하류(downstream, 후속부문, 이미 이루어진 것)로 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상류(미래)는 단지 (우리의)행위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Kurzweil은 전망은 종교적 믿음의 기존의 목적으로부터 신앙을 잃은 사람들에게 있어 대체적인 전망으로 여겨진다. 이는 절망 대신, 진화론적 발전(improvement, 비록 발전이라는 개념이 물질론적 세계에서있어 약간 이질적이긴 하지만)에 대해 기뻐한다. 이에따라, 그가 이러한 신념을 발전시키면서 결국 신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의 관점은 인간의 종교적 관점과 가깝지, Bill Joy의 절망적인 관점 또는 이전 세기에서의 환원주의 다윈주의 물질주의(reductionist Darwinian materialism)와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없는 지적인 문화에서 초월적 존재를 찾는 Kurzweil과 같은 사람에게 있어, 본질적으로 더욱 흥미롭고 매력있도록 만든다. 이는 또한 다음 장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주제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조사를 더욱 값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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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틈날때마다 번역하는거라 할때마다 단어가 혼용되고 있는데(그래서 해석이 약간 갈팡질팡하는듯) 좀 더 전체적인 내용이 파악되면 glossary같은걸 만들어서 정리해야 겠다. 그나마 다행인건 지난번처럼 여럿이 달려들어 번역하는게 아닐 뿐 아니라 영어단어 그대로를 입력할 수 있는 자유도가 있어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서론 번역을 하면서 뒷 부분이 점점 궁금해졌다.



거짓된 딜레마(false dilemma) - 네이버 지식인

이분법적 사고의 오류, 흑백 논리의 오류, 그리고 잘못된(그릇된) 딜레마 (False Dilemma)의 오류는 결국 같은 개념입니다.

잘못된 딜레마의 오류, 즉 잘못된 이분법(False Dichotomy)는 A 아니면 B라른 두 가지 예시를  제시하는 과정에서 오류를 저지르는 논증입니다.  실제로는 A,  B 외에도 다른 선택이 많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고의나 실수로 A와 B만을 제시하는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이러한 양자 택일적인 특성 때문에 잘못된 딜레마는 흑백논리라고도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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