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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여인을 읽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지난주말에 엄청나게 몰아봤다. 그에따른 후유증으로, 내가 지금숨쉬는 순간순간이 영화속 한장면인것같다는 착각을 받게되었다. 지하철 통근시간에 들려오는 다양한 잡음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들.. 모든 순간이 영화의 일부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삶임에도 불구하고 TV 화면으로 나의 삶을 멀리서 지켜보는것만같은 신기한 경험을 하였다. 이런 현상의 좋은점은 그저 스쳐지나가던 일상의 부분들이 좀 더 감동적으로 다가온다는거다. 원래도 삶을 비현실적으로 대하긴 하는데(이건 꿈이야!) 홍감독의 영향으로 좀더 그 느낌이 강해졌다.
아무튼 홍감독에 대한 side effect로, 안톤 체호프의 문학세계에도 빠져버리게 되었다. 이유는 홍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는 영화속에서, 안톤 체호프의 '사랑에 대하여'라는 단편소설의 일부가 인용되었고 그것이 매우 인상깊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의 창작물에 심히 감동했기 때문에, 최대한 그들의 모든 작품을 접해보려고 하는중이고, 안톤 체호프에 대하여는 가장 유명하다고 알려진 '귀여운 여인'이라는 비교적 짧고 난해하지않은 작품부터 나의 느낌을 차근차근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러다가 논문도 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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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감독과 체호프 작품들의 특징은, 그냥 흘러가는 일상처럼 사건들을 서술하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치면 내용마저 스쳐지나가 버려서 아무런 느낌도 남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뭐야, 시시하네'라는 반응이 쉽게 나올 수 있다. '귀여운 여인'도 마찬가지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자신의 의견이 없는 올렌카라는 주인공이 여러 남자들과 사랑을 나누다 모두 헤어지게되어 절망한다. 그러던중 자신과 피가섞이지않은 어떤 아이에게 모성애를 느끼게 되며 희망을 되찾는다'는 내용이다. 혹자는 크림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을들어 '입장을 계속바꾸는 그리스의 모습을 풍자하는 글'. 혹은 '러시아의 지배자 니콜라이 2세를 풍자한 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말그대로 '귀여운 여인'의 모습을 소설로써 정말 잘 표현해냈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런 귀여운 여인을 만난 몇몇 남자들은 이 소설을 보면서 아련한 옛기억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를 생각해주고 고운 마음씨를 가진 착하고 동정심 많은 여자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준다. 게다가 한 여자가 '자신의 넋두리를 듣고 공감하여 눈물을 글썽'이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로 귀엽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물론 상대에 공감하며 표현하는것을보고 일반적으로는 아름답고 감동적이다라고 표현하지만, 상대여자가 정말 어린아이와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공감해준다면 그것은 정말 '귀엽다'로 표현하는게 맞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 이것이 아마 귀여운 여인의 조건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이 인형놀이를 하면서 상대 인형을 정말 사람처럼 아끼고 보살피는 모습이 떠오른다. 인형에게 맛있는것을 먹인다고 나름대로 정성스럽게 요리를 해서, 막힌 입에다가 숟가락을 접촉시키는 행위를보면 참 귀엽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은 정말로 행복한듯이 인형을 보살피는것을 좋아한다. 그것이 아이들의 사랑방식이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나이가 들어서도 유지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옳은/그른 사랑이다라고 규정하는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선택한 사랑의 방법중 하나인것이다.
체호프의 '사랑에 대하여'에서 사랑에관해 논의하는중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어떤 경우에는 유용해보이는 설명이 다른 수십가지 경우에는 소용이 없는 겁니다. 제 생각에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경우를 종합하려 하지 않고 각각의 경우를 따로따로 설명하는 것이지요. 의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구체적인 사례를 개별화할 필요가 있는거죠.'
물론 다양한 사랑방식이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나는 올렌카와 같은 사랑은 흔히말하는 '일반적인' 환경에서는 오랫동안 유지되기가 어려울거라는 걱정을 한다. (물론 보편적 사랑공식으로는 이런형태의 사랑을 지속시키기 어렵지만, 이러한 성향에 딱 매칭되는 사람과의 사랑이라면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겠다 생각한다. 그래서 위와같은 말이 나온걸거다.) 그 이유는... 올렌카의 면면을 보다보면 애정결핍의 일종인 의존성 성격장애(Dependent Personality Disorder)의 전형적인 모습이 얼핏 보이기 떄문이다. 나무위키와 아동심리치료 사이트에서의 의존성 성격장애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이들은 의지할 대상을 찾아내고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도 적극적으로 복종하면서 의존 관계를 유지하는데 이것은 스스로의 삶을 책임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능한 타인이 자신 대신 선택해주고 보호해주기를 원하며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비굴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타인에게 이용당하기 쉬우므로 사회 생활에 많은 지장이 있다. 의존성 성격장애는 보살핌을 받고자 하는 과도한 욕구 때문에 상대방에게 순종적이고 의존적인 행동을 한다. 아주 사소한 결정부터 타인에게 의존하려고 해 상대방을 지치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매달린다는 점에서는 경계성 성격장애와 비슷하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을 받게 될때 경계성과 달리 그 사람에 대한 포기가 빠르다(크게 상처입거나 낙담하지 않고 낙천적인 모습을 보인다). 금새 자신을 책임져줄 또 다른 사람을 찾아낸다."
그녀는 아직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아이와같다. 스스로 선택하는것도, 주장을 내세우는것도 어렵다. 그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그녀의 의존성은 더욱 심해진다. 그렇게 여럿의 남자를 떠나보내고 혼자가 된 그녀는 결국 삶의 목표를 상실하게 된다. "그녀에게 가장 큰 불행은 무슨 일에 대해서나 자기의견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머릿속이나 가슴속은 자기집 정원처럼 공허하기만 하였다. 그것은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고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을 떠났던 남자가 부인과 어린아들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온다. 인근 여관에서 거처를 찾으며 머물고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올렌카는 그들을 자기집으로 초대하여 살게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아이를 돌보게 되고, 그것은 모성애의 형태로 발달되어 그 아이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발달한다. 그러면서 다시금 예전의 한창때의 귀엽고 생기있는 사랑꾼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다. (삶의 목적을 되찾음) 또한 그녀는 아이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늘어남에따라 자연스럽게 '주체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그와중에 아이는 "싫어 저리가 날 때리지 말아"라는 잠꼬대를 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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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만나는 남자들은 불운하게도 모두 죽는다. 하지만 정말 물리적인 죽음만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것일까? 사랑 호르몬이 분출되는 시기는 몇년이내라고 알려져있다. 아무리 같이못살아 죽을것같은 관계더라도 결혼하고 몇년후면 남남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러한 사랑꾼들은 어디론가 계속 그 사랑을 표출해내야하는데 그런감정의 종료기간이 다가오는순간 그들의 삶은 목적을 상실하고 방황한다. 그런 방황중에 잃어버린 사랑이 자식에게로 쏠리게된다. 그리고 그들의 자식사랑은 너무나 대단해서 자식을 그들의 손에서 놓지 않으려 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자식들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탈을 시도하게 된다. 자주보게되는 광경이다.
체호프는 이러한 끝없는 사랑을 갈구하는 여성을 '귀여운 여인'으로 규정하였고, 자기자신을 희생하는 무한한 사랑을 쏟는다는점에서 이를 긍정적으로 묘사한것 같다. 가부장적인 사회속에서의 여성은 자기주장을 펼칠수가 없어 자연스레 이러한 귀여운 여인의 모습이 되기 마련이고, 이 소설은 그러한 모습을 '선'으로써 표현한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여자들의 교육의 기회를 박탈했던 지난날들은 어떻게보면 여성의 무지(無知)를 통하여 '어린아이와같은' 모습을 유지시키고 남자에게 판단을 맡겨버리도록 하기위한 사회적 장치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온전히 가정에 헌신하는 모습은 그런 시대상에서 바람직한 모습으로 인식되었겠지만, 자신의 꿈을 억압받고 행복의 범위가 축소된채로 사는 삶을 산다는것은 전체적인 인류애적 시각에서 본다면 그렇게 긍정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다행히 인식이 바뀌어 남자와 여자 구분없이 누구나가 주체적인 꿈을 갖고 그 꿈을 펼치는 세상이 되었다. 올렌카가 아직은 '귀여운 여인'으로 인식되지만, 몇년후에는 그것이 어떻게 바뀌게 될지 궁금하다
책의 표지를 보자. '행복한 여자의 영원한 모델'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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