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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자들에게 인생의 즐거움을 묻다를 읽고

"자기 서사란 자기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의식적 활동이자 다양한 방식의 자기 존재의 표현이다. 자기 서사는 내가 쓰는 나의 삶의 역사이고 지금 여기라는 실존적 의식의 흔적들이다. 지구라는 별에서 살아간 사람 중에 누구보다도 크게 자기 서사를 말해왔고 그렇게 살아가려 분투했던 사람들이 실존주의자들이다."

"소크라테스는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란 자기 삶의 의미를 검토하는 삶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받아 칸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사유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물음이라고 생각했다. 이 질문은 개별자의 관점에서 '나는 누구인가'로, 지평이라는 시각에서는 '삶이란 무엇인가'로 치환된다."

"그들은 삶은 흐리고 불안하고 우울하지만은 않다는 것, 본래적인 자아 찾기로서 자기 서사가 진정한 실존적 삶의 시작이고 재미의 발견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서론에서 작가는 위와같이 실존주의자들을 소개하였다. 실존주의자들은 주체적이고 의미있는 자신들의 삶을 살기위해 일생동안 노력해왔고, 그러한 투쟁의 서사는 그들의 작품으로남아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같은 사람은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재미를 느끼며 비교적 편하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된다. 이 책은 소포클레스부터 카뮈에 이르는 다양한 작가들을 초대해 그들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며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추구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요약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책에서 소개된 작가들과 그들의 대표작을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출생순) : 

소포클레스(오이디푸스 왕), 키에르케고르(죽음에 이르는 병), 프리드리히 니체(안티크리스트),  마르틴 부버(나와 너), 제임스 조이스(젊은 예술가의 초상), 버지니아 울프(댈러웨이 부인), 프란츠 카프카(변신), 칼 야스퍼스(일반정신병리학), 마르틴 하이데거(존재와시간), 생텍쥐페리(어린왕자), 장 폴 사르트르(구토), 사무엘 베케트(고도를 기다리며), 시몬 드 보부아르(제2의성), 알베르 카뮈(이방인)     

 

책의 목차도 매력적이다. : 

1부. 왜 지금 자기 서사적 삶을 시작해야 하는가? (생텍쥐페리, 장 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2부. 나를 더 잃어버리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키에르케고르, 프란츠 카프카, 마르틴 하이데거)

3부. 치열했고 부서졌고 사랑했고 찬란했던 (제임스 조이스, 칼 야스퍼스, 소포클레스, 프리드리히 니체)

4부. 희극과 비극, 그 무엇으로도 덧칠할 필요 없는 우리 삶을 위하여 (시몬 드 보부아르, 마르틴 부버, 버지니아 울프, 사무엘 베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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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들의 독후감/감상평 읽는것을 좋아한다. 작품에 대해 내가 이해한것이 적절한지 좀 더 객관적으로 알 수 있고, 그리고 타인이 서술해놓은 관점이나 표현/해석을 접하는것이 좋다. 특히 내가 생각한바와 일치도가 더욱 높아질수록 동질감을 느끼게되어 반가움과 뿌듯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각 작가들/작품들의 핵심을 정리해 놓은것을 보면서, 내가 생각했던 부분을 콕콕 집어줘서 좋았다. 특히 내가 지식이 짧아 차마 표현해내지 못했던 부분을 전문적이고 명쾌하게 서술해놓은 부분을 보면서 사이다 한사발 들이킨 느낌을 받았다.

 

각 작가들의 대표작들을 읽은 후에 이 책을 읽어야 진정으로 이 책과 공감할 수 있을것으로 생각된다. 언급된 책들중에서 반정도밖에, 그것도 아주 옛날에, 읽지 못했었는데 이참에 마저 다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4부는 별로..). 나는 실존주의적인 작품/글을 읽는것을 좋아한다. 실존적 삶을 위해서는 부조리에 순응하지 않고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기 때문에 삶의 기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하나') 이런 작품들을 읽고나면 상처받은 삶을 위로받고 힘을 얻게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실존주의자가 될수는 없다. 즉 모든사람들이 '어린아이'로 남아있을수는 없다. 한참 실존주의가 유행처럼 번졌을 그 당시에, 진정으로 이 사상을 몸으로 체화한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 물론 긴박한 상황속에서 실존에 대한 열망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퍼져나가 국가적인 문화 형성에 도움을 주었겠지만, 현재의 사람들은 이내 사회시스템에 적응하고 이를 마치 고상한 취미또는 오래된 유산처럼 다루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현재 한국 사회분위기에서는 더더욱 실존주의자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문화적 근본이 부족할 뿐 아니라, 겉으로는 도전을 장려하지만 '주제를 알아라'와 같은 집단주의가 뼈에박혀있고, 이는 현정부 이래로 더욱 심화될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투쟁은 비효율적인 활동, 그리고 반사회적인 활동으로 묘사되어 '사회부적응'라는 인식이 만연하다 (남 눈치보기도 한국인 DNA). 사회가 원하는대로 사는 삶, 이것이야말로 개돼지의 삶이 아닐까? 이런 천편일률적인 삶과 세상에 구토하지 않는다면 진정 개돼지와 다를게 무엇일지 다시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책에 나왔듯, 많은 실존주의자들의 어린시절을 살펴보면, 무엇인가에 대한 결핍이나 불만이 공통적으로 존재하였다는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삶의 경험들을 통해 부조리함을 '느꼈고', 따라서 이러한 혼돈을 해석하고 개선하려는것이 그들이 근본적으로 추구하려던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가정/삶에서의 불안정 (안정의 결핍)은 오히려 그들에게는 사상적 먹이(feed)로 역할한것이 아닐까? 신체적인 결핍또한 마찬가지로 작용할것으로 본다. 결국 그런 다양한 결핍을 인지하고 극복하려는 자세가 실존주의의 근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사회시스템이 고도화되고 완벽해져서 이런 결핍을 느낄 겨를이 없어지게되면 과연 이러한 사상은 유물로 묻히게 될까? 시간이 흐를수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인스턴트성 쾌락만 좆게 될것이다. 예측불가능한 세계 흐름과 맞물려 이러한 개돼지화 현상은 점차 가시적이고 강화되어 가는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더욱 높은 차원/수준을 열망하는것은 현재 상황에 대한 '만족의 결핍'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상황개선욕구'도 실존을 추구하게되는 하나의 사상적 먹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사람의 질투/경쟁/쟁취 욕구를 거세하지 않는이상 소수의 실존적 투쟁은 계속될것이고, 사회는 이들을 그들과 다르다는 의미인 '적폐'라는 이름으로 명명할 것이다. Challenge Accep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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