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My Lai Revisited After Afghanistan Massacre


Illustration by Newsweek


1968년 3월 16일, 미군소속 두 소대 병력이 월남 Son My구역에 위치한 My Lai의 작은마을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23 보병사단, 11 여단, 20 보병연대, 1대대, C중대 소속이었으며, ‘수색 섬멸작전‘을 진행중이었다. 그들은 아침 8시 즈음 마을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몇시간 후, 300~500명의 시민들이 죽어있었다.

어떻게 이 학살이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에관한 상세한 이야기는 끔찍했다. 총검질과 구타, 그리고 근거리 사격행위가 목격자들에 의해 증언되었고, 이들 모두는 미군을 향한 선제공격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사건이었다. 사망자들 대다수는 여성,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이었다. 몇몇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중에 살해당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몇몇은 “C중대”라는 문구가 피부에 새겨진 채로 발견되었다. C중대는 베트남에서 3개월 정도 머물렀었다.


My Lai 학살은 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각을 바꾼 전환점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기자인 Seymour Hersh가 1969년 가을 이 이야기를 공표하였을 때, 군 내부조사는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실제로 기소된 사람은 그는 C중대를 지휘했던 William Calley 소위 단 한명이었다. 미국 내에서는 그 기소사건이 유명하진 않았다. 백악관 자체투표에 의하면 미국인 5명중 4명이 그가 풀려나기를 원했다고 한다.


John E. Mueller가 1973년 “War, Presidents and Public Opinion”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언급했듯, 전쟁에 대한 지지도는 이미 어느정도 수그러들고 있었다-특히 교육을 덜 받은 계층에서. 학살사건이 알려지고 난 후, 시민들의 지원은 오히려 증가되었다. 학살사건당시, 미 지상군은 베트남에 3년동안 배치된 상태였다. 반전 세력에게 충격을 안겨준 Kent State 학살사건은 아직 발생을 앞두고 있었다.


잔혹행위의 메아리 : 40여년 후로 돌아와 보자. 아프가니스탄의 남부 Kandahar지역에서 16명의 희생을 불러온 미군에 의한 광란적인 총격사건은 My Lai 사건과 비교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최근의 사건은 이전의 사건과는 다르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이번 사건은 Robert Bales 하사의 단독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My Lai 사건에서는, 두 소대가 학살에 가담했었다. C중대 소속의 일원이 추후에 증언하길, 그들은 단지 Calley 소위가 명령한 것을 따르고 있었다고 하였다. - 그리고 그 명령은 베트콩의 마을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였다. (Calley가 재판에서 말하길, 그곳의 아이들 또한 수류탄을 던졌다고 하였다.)


이것뿐만 아니라 다른 더 큰 차이가 있다. 미국은 변해왔다. 특히 군복을 입은 상태로 저지르는 만행에 대한 우리(미국인)들의 시각이 말이다. 모든 분쟁에는 잔학행위가 발생하였고, 이러한 역사의 대부분에서, 우리는 “너무나 적은“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당연하게 그러한 일들을 숨겨 오면서, 그것들이 우리의 대의를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하였다. My Lai 사건은 다행히도 그러한 관습들에 종지부를 찍게 해주었다.


Calley 소위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개인적인 이유로 시민들을 도랑에 몰아놓고 사격한 사람'에게는 적당한 형벌이었다. 하지만 그의 형량은 점차 20년형, 그리고 10년형으로 줄어갔다. 결국 Calley는 3년 반의 가택연금 후에 풀려났다.


어느 누구도 Bales 하사에게 그러한 관대한 운명이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라크의 Abu Ghraib에서의, 포로들에 대한 학대사건의 여파를 생각해 보자. 372 군경중대의 몇몇 예비군들이 감옥형을 선고받았고, Charles A. Graner Jr. 상병은 10년의 감옥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Kansas Leavenworth에 위치한 영창에서 6년 반의 형을 마치고 풀려났다. 그곳은 Calley 소위가 종신형을 선고받아 갇히게 될 곳이었다.


명예로운 헌신 : 많은 사실들이 간번에 잊혀지지 않는것이 중요하다. 학살당시, 100만이 넘는 베트남에 배치되었다. 모든 이들은 그곳에 누가 있었는지 알고 있다. 2006년에 국방부에 의해 공개된, 전쟁 중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많은 파일들에 있어서도, 미국, 군대, 세계관에 대한 종합적인 실정을 대변하는, 변명할 수 없는 범죄행위를 숨기려 드는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최근에 발생한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 대한 전쟁에 대해서도 동일한 이치를 갖는다.


대부분의 군인들은 무한한 명예와 용기로 국가에 헌신한다. My Lai에서와 마찬가지로 Abu Ghraib에서 가해자의 행위를 저지했던 사람은 동료 군인이었다. 1988년, 2명의 군인들은 My Lai에서 민간인들을 보호한 공로를 인정받아 Soldier’s Medal을 수여받았다. 그중 한명인 헬리콥터 조종사는, 가해자와 피해자들 사이에 기체를 착륙시켰으며, Douglas MacArthur장군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여 말했다. “병사는, 아군이든 적군이든, 약하고 비무장된 사람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






댓글

Holic Spirit :: Tistory Edition

design by tokiidesu. powerd by kaka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