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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R.U.R.을 읽고 & 공연 정보

 

제목 선정부터(왜 Rossum's Universal Robots을 로섬의 '만능'로봇이라고 하지 않고 '로봇'으로 했는가)시작하여 상당히 공을 많이 들인 흔적이 많은 훌륭한 번역작품이다. 비록 절판되어 이제는 구할길이 한정적이지만, 그래도 로봇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해서 탄생했는가에 대한 교양을 쌓을 수 있으며?, 그리고 로봇의 미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만큼, 읽기를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짧은 희극작품으로서, 각 캐릭터의 배경과, 성격을 상상해가며 전개를 따라가다보면, 이들 개개인이 현재 상황과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자연스럽게 머리속에 그려지게 된다. 기술의 발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각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들의 생각에 대해 동의할 수 있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그들 중 어떤 하나만이 선택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마치 독자로 하여금 그들을 판결하도록 하는듯한 느낌을 준다. 마치 부스만이 말했듯, "범인을 찾아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이런 건 비극이 발생하면 주로 선호되는 위로 방식이죠."


늙은 로숨은 인간을 복제함으로서 신의 존재(혹은 필요)를 부정하려 했으며, 그의 아들인 젊은 로숨은 늙은 로숨의 결과물을 효율적으로 대량생산 할 수 있는 '공장'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도민은 이렇게 대량 생산된 인조 노동자, '로봇'을 통해, 고통과 빈곤이 없는 세상을 위해, 더 나아가 '초인'을 위한 세상을 꿈꾸었으며, 갈 박사는 과학 기술의 폐혜를 예상하고도 연구를 진행하여 예측하지 못한 인류 종말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들은 로봇 발전에 주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아예 시작을 안했으면 되지 않았겠는가!'에서부터 '여기까지만 개발했으면 됐지 않는가!' 등과 같은 제각각의 판결이 나게 될것이고, 이들중 누가 옳고 그른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구분하기는 사람마다의 평가가 다를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과학기술이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많은 사람들의 '요구' 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주변 인물들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봇을 딱히 여기고, 이들의 권리를 위해 로봇이 생산되는 외딴섬으로 오게 된 헬레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봇들의 대우는... 그러니까 로봇들은... 사람들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 아하, 그러니까 로봇들도 투표를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설마 로봇들도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까지는 아니시겠죠 / 당연히, 임금을 받아야만 합니다". 1920년대에 작성된 이 책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는 작가의 통찰력에 놀랄 따름이다. (동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게 된 시점이 현재로부터 멀지 않은것을 감안해보자) 하다못해 지금 로봇의 권리를 주장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하녀인 나나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과학의 발전이 창조주의 뜻에 거스른다'고 생각하였다. 부스만은 꺼져가는 자신의 생명의 촛불을 살리기 위해 부질없는 돈을 가지고 협상을 하려 하였지만, 협상도 하기 전에 안타깝게 죽게 되고(영화등을 보면 막판에 꼭 이런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할레마이어는 인간적 (즐기는) 삶이라는 것에 만족하며, 이를 인간 생존의 이유로 생각하며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최후의 인간이 된 알뀌스트는 마치 로봇과 같이, 주위 환경에 아랑곳하고 자신의 일을 묵묵히 처리하는 사람이었으며(이 이유로 인해 로봇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로봇같다고), 나중에는 아무리 훌륭한 발명이라도 '사랑'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어느날인가 사람들로 빽빽한 전차를 타고 가다가 불편하게 서로 부대끼면서도 무표정한 승객들을 보면서 로봇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일만 하고 생각은 하지 않게 된 존재들, 비인간화되어가는 기계문명 속에서 생산의 효율과 능률만 따지게 된 인간, 각각의 개인들을 배려하기 보다는 집든으로서의 다수군중이 존재하게 된 현대사회, 자신들이 만들어낸 기계문명에 자신들이 끌려가게 되는 상황. 이러듯, 인조인간 로봇에 대한 발상은 문명과 역사의 흐름을 섬세하게 감지한 한 작가의 현실적인 관찰에서 시작되었다" - 서문에서


"그는 로봇이다. 그는 로봇처럼 손으로 노동을 한다. 그는 집을 짓는다. 그는 일을 할 수 있다"라는 문장은, 인간을 증오하며(혹은 정말로 '인간다우며'), 인간보다 진화단계 상 더 우위에 있는, 로봇 '라디우스'가, 기생충처럼 로봇에게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 '알뀌스트'에게 내린 판결이다. 짧은 문장의 연속으로 보이는 이 문장이 너무나 섬뜩한 것은, 만약 현대시대에 인간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인간들에게 심판을 내리며 위와 같은 말을 하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에 반박하지 못한 채 '생존'할까에 대한 걱정이겠지, 그리고 이것이 작가가 글을 쓰게 된 계기가 아닌가 싶다. 즉, 이 작품은 마냥 인간과 같이 생기고 행동하는 개체의 등장에 초점이 맞춰지기 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도록 작성된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로봇'이라고 생각하는 깡통로봇과는 다르게, 이 작품에서의 '로봇'은 마치 흙으로 만든 형상에 부적을 넣어 생기를 불어넣은 골렘과 같이, 늙은 로섬이 여러 물질을 조합하여 정성스레 빚어낸 사람의 모습을 한 인조'생명'에 가깝다. '코를 만들어야 겠다' 하면 복잡한 알고리즘을 구현할 필요 없이 코를 빚어내면 되고(단, 이런 내용은 없다), 마치 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로봇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프로세스로 하나의 로봇이 만들어 진다. 그당시에는 전자계산기라는 개념이 없었으므로 마치 신화에서의 그것처럼 로봇이 만들어 지는데, 산업문명에 부응하여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아들인 젊은 로섬이 공장을 통해 로봇을 대량생산해 내었다는 것이 포인트이다. 


앞에서도 적어놓았지만,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볼 것은 사람과 동일한 모습을 한, 다른 물질로 이루어진, 약간 기능이 떨어지는 로봇이라는 개체가 대량 생산되는것과, 사람이 학교나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모습이 매우 흡사하며, 이때 만약, 사람이 로봇처럼 반복된, 제한된 일상만 살게된다면, 결과적으로 로봇과 사람에 있어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왜 로봇을 인간만큼의 수준으로 만들지 않는가!라는 질문과 이에 대한 답이 있는데 재미있으면서도 현재 자본주의의 약점을 풍자하는것 같아 씁쓸하기까지 하다.


작가는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생리적 관계인자'가 변형된 로봇인, 쁘리무스와 헬레나(사람 헬레나와 동명)를 등장시킴으로서 대답한다. 생식 능력을 구현받지 못한 로봇들은 자신들의 지속적인 생존을 걱정하였고 따라서 최후의 인간 알뀌스트에게 이러한 능력을 연구하도록 한다. 이때 서로에 대한 알수없는 '감정'같은 것을 우연찮게 느끼게 된 쁘리무스와 헬레나가 알뀌스트의 눈에 들어오게 되고, 알뀌스트는 이들에게 호기심을 느끼며 이들 중 하나를 해부하려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자신을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려는 각각의 로봇을 보며, 아담과 이브라는 이름을 불러주며, 그들을 놓아주게 된다. 창세기 1:27~28, 31을 부르짖으며, 알뀌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주님, 이 종을-가장 쓸모없었던 못난 종 알뀌스뜨를 거두어주소서. 로숨, 파브리, 갈, 위대한 발명가들이여, 저 소녀와 저 소년, 사랑과 눈물과 다정한 웃음, 남편과 부인의 사랑을 발견한 저 최초의 한 쌍보다 더 위대한 것을 정녕 그대들은 발명하지 못했네. 자연이여, 자연이여, 생명은 불멸이오! 친구들, 헬레나, 생명은 불멸이네! 생명은 사랑으로 다시 시작할거요. 벌거벗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하겠지. 야생에 뿌리를 내릴 거요, 그리고 그 생명에게 우리가 행하고 건설했던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게 되겠지. 우리의 마을과 공장, 우리의 에술, 우리의 사상은 모두 다 생명에게는 아무것도 아닌게 되겠지, 하지만 생명은 불멸할 것이오! 단지 우리들만 멸망한 것이오. 우리의 집과 기계는 못쓰게 되고, 우리가 이루어 놓았던 체계는 붕괴되고, 위대했던 위인들의 이름은 마른 나뭇잎처럼 떨어지겠지. 그러나 오직 너만은, 사랑이여, 너만은 이 페허속에서 꽃을 피워 생명의 작은 씨앗을 바람에 맡기리라. 주님, 이 종을 평화로이 거두어주소서. 이제 이 두 눈이 지켜보았으니-당신께서 사랑을 통해 구원하심을 지켜보았으니, 생명은 불멸할 것입니다! 불멸입니다! 불멸!"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 창세기 1:27~2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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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부터 읽으면서 무언가 어두운 기운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압박하고 있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분위기가 헬레나에게 집중됨에 따라 (물론 스펙타클하게 바뀌는 면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무언가 침울한 습지대 속에서 피는 맑고 생기있는 꽃이 피는것과 같은 생기 혹은 변화를 받게 되었다. 헬레나라는 동일 이름을 가진 로봇이 등장할때도 마찬가지로 이와같은 인상을 남긴 것은 역시 우연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이 작품에서 이름의 의미와 역할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다. (어디에선가 적혀있었듯, 등장인물들의 이름 각각에는 의미가 있었다) 


전체적인 글의 흐름은 좋았지만 단, 쁘리무스와 헬레나의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애정행각에는 손발이 오그라 드는 느낌을 지울수는 없었다. "당신은 우리 중 누구도 죽이지 못할거요, ... 우린-우리는-한몸이니까!" 으아아... 그리고 만약 이 작품이 현대에 적용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작품에서는 자기들끼리의 생식기능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에게 손을 빌려야 했지만, 현대 로봇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서로 공유하며 발전하시키면서, 이미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번식? 기술을 개발해고 온 세상을 뒤덮었겠지. 마치 터미네이터와 같은 전개가 이루어 진다!!


아무튼, 만약 이 작품이 소설의 형식으로 전개되었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느낌과 충격을 받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여기에서 번역의 완성도를 높이 산다!) 마침 이번달 19일과 20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알유알(R.U.R.)의 제목으로 공연이 되는데 여기에서 무대와 인물들이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 매우 궁금하다.


자세한 공연 정보는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http://www.lullu.net/bbs/zboard.php?id=inform01&no=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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